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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인식
조회수 1 작성일 2016-11-16 13:39:46
아레오바고의 설교
사도행전 17장 32절 #8211; 34절
사도 바울은 외모와 달리 누구보다도 많은 학문과 학식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지역에서 유행하던 소피스트들처럼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동조하게 만드는 것에서는 남에게 지지 않는 토론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배우고 터득한 헬라철학등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에 섰을 때 자신있는 모습으로 당시 새로운 학문들만 취급하는 사람들과 당당하게 겨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자신감이 도리어 복음전도에 커다란 해악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행하심을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이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해온 철칙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동역자들이 없는 상태에서 학문적인 자긍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육체가 살아나 사도 바울로 하여금 성령님만 의뢰하는 자리에 서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아덴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을 실패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는 사도 바울이 이런 자긍심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론에만 머물면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종교는 되지만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의 실재이고 삶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학문적인 배경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린아이들 같은 자기의 자랑꺼리를 붙잡지 않는 자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자신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무리들을 보면서 연설을 합니다. 누가 나서더라도 논쟁에서는 결코 뒤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바울사도를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복음전도의 접촉점을 아덴에 널려져 있는 우상들에게서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아덴사람들은 오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종교성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사람들의 종교성은 아주 특별합니다. 이러한 종교성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종교성은 자기를 위한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도사람들이 이방나라의 신들을 자기나라 여러신들의 하나로 받아드리면서 그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자기를 위한 신 하나를 더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신을 만들고 섬기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역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에게 더 도움이 되어 보이는 신들이 보이면 지금까지 섬겨온 신들을 쓰레기통에 넣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벨론문화의 특징입니다. 우리도 신앙이 아닌 종교로서 즉 자기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에 다닌다면 우린 여전히 구속받지 못한 아담의 후손일 뿐입니다.
아덴사람들은 어떤 신을 빼놓고서 섬기면 그 신이 진노하여 불행이 닥칠까봐 이름을 모르는 신까지도 만들어 놓고서 섬겼습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며 신을 섬긴다고 하지만 자기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덴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데 아덴사람들이 모르는 그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던 인물입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서 예배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이 사람이 지은 그 조그마한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단지 예배가운데 임재하시는 것 뿐이지 그 건물을 집 삼고 사신다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시며 동시에 이젠 예수님을 영접한 개별인격체들과 연합된 교회가 성전인 것입니다. 예배당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계시는 곳이 바로 성전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누구라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류가 한 혈통이란 사실과 사람이 살고 죽는 기한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불신자라도 살고 죽는 기한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살고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신이 함께 하는 자는 신의 소생이라고 어떤 자들이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은 사람이 만든 우상가운데는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은 복음전파되기 이전에는 이방사람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허물을 판단치 아니하시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이제부터는 그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정하신 사람 즉 예수님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라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날을 정하시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증거로 주셨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그것에 동참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라도 공의의 심판을 받는 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공의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이를 기롱합니다. 당시 아덴사람들은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고 더욱이 죽은 자의 부활이란 사고 체계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도무지 받지 못할 이야기를 하는 바울사도를 아덴사람들은 조롱하면서 그들이 들어 본적이 없는 새로운 것을 전한다는 사실 때문에 다음에 또 듣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아덴에서의 복음전도는 철저한 실패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주관하심과 성령의 함께 하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소수의 회심자들을 얻습니다. 바로 관계전도를 통한 결과입니다. 이 회심자들은 사도바울의 화려한 지식 때문에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친하여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바로 삶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화려한 말은 논쟁만 있을 뿐입니다. 그 회심한 자 중에는 아레오바고의 회중재판관이었던 디오누시오와 귀부인 다마리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디오누시우와 다마리는 부유한 사람들로 아덴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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